정원 열풍 거품에 가려진 돌봄의 미학 [.txt]
정원 열풍 거품에 가려진 돌봄의 미학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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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로 국가정원을 지정하고 예산까지 배정할 정도로 정원 열풍이 거세다. 사진은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 울산광역시 제공
2013년 개최된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이후, 정원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증폭되고 있다. 정원 열풍이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열풍 앞에 붙일 수식어로 ‘대중적’과 ‘사회적’뿐 아니라 ‘국가적’을 골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도시 거주자 대부분의 일상에는 정원이 없지만,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원이 호출되고 때로는 산업이나 정책까지 정원과 동행하는 이례적인 정원 현상. 근대 도시의 성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정원이, 도시의 수장고 한구석에 곱게 모셔두었던 정원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격리와 통제로 모든 일애드온시스템
상이 움츠러들었던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정원은 건강과 안전, 위로와 치유의 상징 공간으로 떠올랐다. 트렌디한 이미지 상품의 하나로 정원이 소비되는 현상도 이제 낯설지 않다. 경쟁적으로 정원박람회를 열고 있는 도시가 급증해 그 수를 세기조차 어렵다. 서른곳 넘는 지자체가 ‘정원도시’를 선언했다. 조경 담당 부서의 이름을 ‘정원도시국’으로 바꾼 서울시는 ‘어딜한국신용평가정보실명확인
가든 서울가든’이라는 슬로건까지 내걸었다. 정원을 공원, 선형 녹지, 입체 녹지, 둘레길, 하천변, 도시 재생지 모두를 포괄하는 우산 개념으로 삼은 것이다. 모든 게 정원이어서 정원이 아무것도 아닌, 정원의 시대.
정원을 법률과 제도로 지정하고 국가 예산을 배정하는 유례없는 사업도 펼쳐지고 있다. 산림청이 지원하는 국가정원과 지방정원이 지생존경제학
방자치단체들의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정원 프로젝트를 지역 발전 전략의 한 축으로 삼는 흐름도 확산되고 있다. 물론 정원이 도시의 기반 공간으로 주목받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정원은 사색과 휴식의 장이고,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가 교감하는 공간이다. 정원은 또한 신체의 모든 감각으로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며,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파산신청후불이익
게 하는 장소다. 잘 디자인된 정원은 지역의 정체성을 담는 문화적 장으로 성장할 수 있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녹색 인프라가 될 수도 있다.
‘정원도시’를 선언한 서울시가 내세운 슬로건, ‘어딜가든 서울가든’. 서울시 자료 갈무리
2009년도저소득층지원
하지만 과열된 정원 현상을 되짚어 보면 단기 성과에만 집중하는 보여주기식 행정의 난맥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정원이 표피적으로만 소비되는 양상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일부 정원박람회와 정원도시 프로젝트는 관광객 유치를 위한 도시 브랜딩 전략에 가깝다. 단기간에 화려한 경관을 꾸미는 데 치중하면서 지역성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경우국제결혼중개업체
도 많다. 정원이 저비용 포퓰리즘 공간 정치의 단골 메뉴로 동원되는 사례, 무분별한 개발 사업에 정원이라는 이름의 녹색 면죄부가 발행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동시대 도시가 직면한 기후 변화, 도시 쇠퇴, 공간 불평등 심화 같은 복합적 난제들이 정원의 낭만으로 너무 쉽게 포장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 도시를 들썩이게 하는 정원 열풍청약가점계산기
의 속도와 방향은 정원의 본질적 의미를 되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에 로버트 포그 해리슨의 정원 이론서 ‘정원을 말하다’(나무도시, 2012)는 ‘돌봄’(care)이라는 응답을 제시한다. 해리슨은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캉디드’를 끝맺으며 던진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언명에서 출발해 역사와 문학을 가로지르며 우리는 왜 정원을 가꾸어야 하는지 논모닝
구한다.
해리슨에 따르면, 정원은 인간의 조건,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소양을 배양하는 장이다. 인간 존재의 기반으로서 정원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돌봄’의 윤리와 미학이다. 인류의 첫 정원인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우리가 늘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을 꿈꾸며 정원과 관계를 맺어온 것은 결국 흙을 일구고 생명의 성장과 죽음회사
을 염려하며 살피는 돌봄의 실천 행위다. 해리슨의 돌봄의 정원론은 빠른 속도로 꾸미고 이미지로 휘발되는 최근 정원들의 공허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해버대셔스 홀, 1945년 5월 8일’, 엘리엇 호지킨 작. 런던 대공습으로 파괴된 도심의 폐허에 생겨난 야생의 정원. 위키미디별내지구신일유토빌
어 코먼스
봄의 시작을 알리며 출간된 올리비아 랭의 ‘정원의 기쁨과 슬픔’(어크로스, 2025)을 관통하는 주제도 돌봄의 시간이다. 2020년, 팬데믹의 한복판을 통과하며 생애 처음 정원 있는 집으로 이사한 랭은 폐허처럼 버려진 오래된 정원을 새로 가꿔나가며 우울하고 고독한 시절의 삶을 돌본다. 그가 돌본 “정원의 시간은 (…)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면서 가끔은 아예 멈추기도 하고, 부패와 비옥함이 길고 구불구불한 나선처럼 말려서 항상 순환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내 정원을 만들어냈다.”
이 책은 “공동의 낙원을 찾아”(영어판 부제) “시간을 거스르는 정원”(원제)을 가꿔나간 한 작가의 회고록일 뿐 아니라, 배제와 공존이 교차하고 추방과 해방이 동거하는 모순의 정원 개념을 섬세하게 탐구한 이론서이기도 하다. 랭은 존 밀턴의 ‘실낙원’,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 데릭 자먼의 ‘현대 자연’을 입체적으로 오가며 정원의 희망과 상실, 그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정원 풍경의 이면에 감춰진 특권 계급과 정치의 실상을 들춘다. 화려하고 장엄한 대정원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동원됐던 노예 노동의 참혹함, 회화 속 이상적 풍경을 모방하기 위해서라면 “인간 역시 옮겨 심을 수 있다”는 배제의 논리 위에 세워진 풍경화식 정원의 폭력성. 뒷날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도시공원 양식의 모델이 된 영국식 정원의 목가적 풍경은 농지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 사유지로 만들고 기존 마을까지 몰아낸 폭압적 ‘인클로저’의 산물이다.
정원에 대한 랭의 사유는 도시의 또 다른 거주자인 비인간 생명체로 확장된다. 대공습으로 황폐화된 런던 도심을 스스로 점령한 잡초의 야생 정원에서 그는 의도적 실천을 넘어서는 자기 돌봄의 힘과 미학을 발견한다. “아무도 계획하거나 심지 않았지만 도시의 폐허에 생겨난 이 호화로운 정원”은 “파괴된 곳을 비극의 현장에서 더욱 비옥하고 가능성이 요동치는 곳으로 바꾸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옮긴다. “모두의 정원이라는 그 이단적인 꿈.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씨앗을 털자.”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 환경미학자이자 조경비평가인 배정한이 일상의 도시, 공간, 장소, 풍경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